지나친 자만으로 충신(득래, 밀우, 유유)들을 잃은 동천왕
고구려의 11대 왕은 동천왕(227~248)입니다.
형사취수(형을 죽은 뒤에 동생이 형수와 결혼)한 산상왕은 왕후 우씨와 자식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에 주통촌 출신의 용녀로부터 얻은 자식이 동천왕입니다.
동천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오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고 충신들과 평안한 나라를 만드는데 힘을 쏟았다고 하네요. 하지만 234년에 위와 화친하면서부터 정세는 180도 바뀌기 시작합니다.
238년 위가 요동의 공손연을 토벌할 때 군사 천여명을 보내 위를 도았지만 이는 두 나라의 국경이 맞닿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30대의 젊은 기상으로 위나라와 싸워 서안평을 함락하였고 이 기세를 몰아 계속 전쟁 준비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대장이었던 득래는 위나라와의 더 이상의 공격은 득보다 실이 많음을 알고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지 말고 정비하기를 고합니다.
하지만 동천왕은 이를 무시하였고 득래는 더 이상 자신의 충언은 아무 효력이 없음을 알고 관직을 사직하였습니다. 득래는 이 후 나라를 걱정하다 굶어 죽었다고 하네요.
얼마 지나지 않은 244년 위나라의 관구검은 고구려를 침공하였지만 동천왕은 지형 지물을 이용하여 두 번(비류수와 양맥곡에서)을 격파합니다. 하지만 세 번째 전투에서는 지나친 자신감으로 지형 지물을 이용하지 않고 정공법을 썼는데 대패하여 1만 8천 명이 죽었다고 하네요.
동천왕은 환도성을 버리고 압록강 남쪽으로 달아나지만 관구검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뒤쫓습니다.
위급한 상황에 맞아 장수 밀우는 자신이 결사대를 조직하여 동천왕이 도망갈 시간을 마련하였습니다. 하지만 장수 밀우의 결사대가 관구검의 부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였죠.
동천왕은 이러한 상황을 안타까워했고 또 다른 충신 장수 우유가 계책을 갖고 찾아옵니다. 항복을 표시하러 자신이 간 후에 숨겨 놓은 단도로 장수를 치겠다는 것이었죠.
동천왕은 충신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다른 방도를 생각하지 못하였고 장수 우유는 자신의 계책을 실천합니다. 다행히 위나라 군사를 무찌를 수가 있었지만 이미 환도성에는 득래의 예언처럼 폐허의 땅으로 바뀌고 충신들과 백성들이 죽었을 뿐이었습니다.
동천왕은 다음 해에 폐허의 환도성을 떠나 평양성으로 천도하였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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