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 전 해인사를 갔다오고 난 후에 다음 여행 장소로 수원화성을 선택하였다. 여행을 가기 전에 간략한 정보들을 수집하였고 수집 도중에 [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이란 책을 구입하여 읽어보았다. 다음은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제1부 신도시 화성의 탄생
1789년(정조 13) 7월에 수원도호부에 왕실의 무덤이 들어설 예정이므로 고을을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명령과 함께 244호에 철거비와 이사비를 관청에서 나누어 주었다. 10월 초에 정조가 수원에 찾아올 예정이라 두 달동안 이사를 해야했는데 9월까지 119호는 이사를 하지 않았고 16호는 보상비 받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 때 옮긴 무덤은 다름아닌 정조의 아버지였던 사도세자의 무덤으로 7월 말에 시작하여 9월 말까지 이주하였고 현릉원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유교 사회의 관청이 남향이었지만 화성행궁은 동향을 띄고 있다. 이는 관청과 직각 방향으로 형성되는 간선도로가 서울과 삼남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함이었다. 이는 유교 사회였던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였을 때 많은 저항이 있었지만 실학 정신을 중히 여겼던 정조의 의지에 의해 실용적으로 만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화성을 상업도시로 만들기 위해 물류망을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1792년(정조 16)에 편찬된 [수원부읍지]를 보면 진남루 앞 대로 좌우에 시전이 늘어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북쪽에는 비단을 파는 입색전과 생선·과일을 파는 어물전, 남쪽에는 무명·모시·목화를 파는 목포전과 소금과 일용잡화를 파는 상전, 동쪽에는 잡곡과 백미 등을 파는 미곡전과 관을 파는 관곽전, 종이류와 신발을 파는 지혜전이 있고 따로 읍내 북쪽에 놋쇠와 쇠를 다루는 유철전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시전들은 도시 발전을 위해 수원부사였던 조심태가 조정에서 빌려 온 6만 5천냥 가운데 1만 5천냥을 무이자로 빌려주어 형성된 가게들이다. 1793년(정조 17)에 수원부는 화성으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고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유수는 황제가 수도를 비울 때 행정을 맡게하는 제도이다.
제2부 새로운 발상으로 축조된 화성 성곽
신도시 화성의 성곽은 종래 방식이 산세를 이용한 방식이었던 것과 달리 평지에 세워졌으며 공사 방식이나 목적 등에서 실학정신이 깃들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존에는 전쟁이 발생하면 산성에 들어가 항전을 하였기에 읍성은 위축되었었다. 하지만 화성은 상업 도시로 만들었기 때문에 읍성을 버리고 갈 수 없었기에 화성 주위를 방어할 수 있는 성곽을 쌓게 되었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보면 백성들이 평상 시 훈련이 없고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산성으로 피신도 힘들기 때문에 읍성을 튼튼히 만들어야 함을 주장한 것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익히 [반계수록]을 통해 읍성의 필요성을 인식하였고 실제 화성 성곽에서 이를 현실에 반영하였다.
정조는 명나라에 귀화한 테레츠가 쓴 [기기도설]을 읽고 선진문물에 관심이 많았으며 정약용에게 이 책을 주어 화성 성곽을 짓는데 필요한 기계를 만들 수 있게 도와주었다. 화성 축성 공사는 성역소를 두어 책임자 채제공과 실제 공사 총괄 책임자인 화성 유수 조심태의 감독하에 진행되었고 공사기술과 공사감독을 분리하여 감독하였다. 성곽을 짓는데 필요한 자재를 민간에서 매입을 하고 실제 작업량에 비례하여 임금을 지급함으로써 공사 기간을 단축시켰으며 이러한 공사의 특징으로 인하여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다양한 장비를 사용하게 되었다. 짐을 싣고 나르는 유헝거와 무거운 돌을 위로 올리는 거중기 뿐만 아니라 소가 끄는 대거, 평거, 발거와 네 바퀴가 달려 끌고 다닐 수 있는 동거, 두 바퀴가 있고 끌고 다닐 수 있는 썰매 등 많은 도구들이 사용되었다.
화성 공사는 나라의 큰 행사를 기록하는 의퀘 중 [화성성역의궤]에 자세히 공사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공사에 사용된 도구와 건축 기술 뿐만 아니라 누가 언제 무슨 일을 하였고 임금은 얼마나 주었는지 공사 기간에 음식 재료는 무엇을 사용하였고 양은 얼마인지 등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수원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것도 [화성성역의궤]에 나온 것을 기반으로 사실적으로 재건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제3부 18세기 실학 건축의 정수
화성의 성곽을 보면 전통적인 방법과 지리적인 잇점을 살리는 방법 및 다른 나라에 좋은 사례를 혼합하여 실용적이면서 전통미를 살렸음을 알 수 있다. 성벽의 길이는 4,600보(5.4Km)로 버들잎의 형상을 하고 있다. 성벽에는 100미터마다 방어 시설로 48개소를 설치하였다. 화성은 네 개의 성문이 있으며 이 중 장안문과 팔달문의 옹성 중앙에 출입문을 두어 평시에 사람과 물자가 원활하게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화성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은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으로 조상들이 시를 지우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화성의 성벽은 돌로 쌓은 부분과 벽돌로 쌓은 부분이 있는데 벽돌을 굽과 성을 쌓는 기술이 부족하여 함경도의 기술자를 불러들였으며 근처에 석재를 구하기 쉬운 환경이어서 많은 부분은 돌로 쌓았다. 성벽에 사용되는 돌은 규격을 정하여 사용하였고 채석장소에서 규격에 맞게 다듬고 운반함으로써 효율을 높였다. 화성 공사에 사용된 대부분의 도구는 이와 같은 돌들을 운반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목재 건축물들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수준 높은 기술을 지니고 있었기에 충분히 독창적으로 화려함을 뽐낼 수 있었다.
-4부~6부, 그리고 아쉬움
화성은 정조의 의지에서 출발하였기에 정조의 갑자스러운 죽음으로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화성을 만들어 현왕은 수도에서 정치를 하고 상왕은 화성에서 정치적 조언을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정조의 꿈은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미쳐 펼치기도 전에 사라지게 되고 세도정치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화성행궁은 강제로 파괴되고 성곽은 방치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반발하면서 전선의 중심에 있던 수원은 전투와 폭격에 의해 폐허가 되었고 화성은 거의 모든 것이 사라지는 듯 하였다. 다행히 정조시대에 쓰여진 [화성성역의궤]의 상세한 기록으로 성곽의 복원은 거의 본래 모습에 가깝게 이루어졌다. 1997년 4월에 유네스코에서 파견된 조사관 니말데 실바교수에게 이를 건네주자 그는 상세하고 방대한 자료에 놀라워하였다.
이 후 경기문화재단과 수원시에서는 [화성성역의궤]의 한글본과 을묘년에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의 환갑에 8일간의 화려한 행차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한글본과 원본으로 출판하는 작업을 하여 오래도록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아쉽게도 이들을 구입하고자 하였지만 현재(2013년 1월)는 그들을 판매하는 곳이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수원 화성 여행 후기
[수원 화성]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재현 정조대왕의 8일간의 행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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